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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특집카테고리 없음 2023. 10. 18. 16:51
종 교 개 혁 5 0 0 주 년 기 념 특 집
종교개혁의 발자취를 따라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문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촉발된 종교개혁이 올해로 500주년을 맞는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본 교회의 설립자이신 휘선 박윤식 목사님의 구속사 시리즈가 발간된 지 10주년이 되었고, 목회 사역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이에 교회에서는 ‘종교개혁 답사’팀을 구성하여 지난 8월 21일부터 9월 2일까지, 13일간의 일정으로 독일과 스위스, 스코틀랜드 등 종교개혁지를 직접 답사하게 되었다. 루터와 칼빈, 존 낙스 등 오늘날 개신교의 뿌리가 된 개혁자들의 신앙을 배우고, 특별히 휘선 박윤식 목사님의 개혁신앙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글과 영상으로 성도들과 나누고자 특집을 만들게 되었다. 본지에서는 총 4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글_홍봉준 목사, 사진_안지영 기자
종교개혁의 샛별이 뜬 곳, 프라하
비행기로 11시간을 날아서 도착한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하늘은 맑고 날씨는 선선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곳에 첫 발을 내딛은 우리 팀들은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한국에 비해 제법 쌀쌀하기까지 한 프라하의 아침 공기를 마시며 다음 날 오전 9시, 일행은 체코의 첫 일정으로 프라하 성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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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성은 9세기 중반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14세기 카를 4세 때에 지금과 비슷한 길이 570m, 너비 128m의 성의 모습을 갖추었다. 1918년부터 대통령궁으로 사용되면서, 현재까지 사용되는 성 중 세계에서 가장 큰 성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프라하 성 안에서는 비투스 성당의 웅장한 모습이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1344년에 착공하여 1929년에야 완공되었으니 무려 600여 년 동안 지어진 성당이다. 제단 오른쪽에 1,000여 개의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방은 바츨라프 왕의 예배당으로 그의 왕관과 보석이 보관되어 있고, 지하에는 그의 무덤과 함께 왕실 무덤이 있다. 이 프라하 성이 존 낙스와 관련된 것은 그가 죽은 지 4년 후의 일이다. 소위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으로 알려진 1419년 7월 30일. 이날은 체코의 대주교 얀 후스가 화형을 당한 이후 그의 추종자들이 지방의회 의원 일곱 명을 창문으로 던져 죽인 사건을 말한다. 2차 창문 투척 사건은 약 200년 후, 1618년 5월 23일에 발생한다. 지금의 체코였던 보헤미아의 왕위에 오른 페르디난트가 왕이 되자마자 카톨릭으로 선언하고 개신교를 탄압하자 분노한 보헤미아의 귀족과 백성들이 페르디난트를 대신해 보헤미아를 다스리던 섭정 등 3명을 창문에 던진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으로 카톨릭 세력과 신교 세력간의 치열한 30년 전쟁이 촉발되고 말았다. 유럽 대륙은 30년간이나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1648년 베스트팔렌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크게 네 가지 합의 사항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톨릭, 루터파와 더불어 칼뱅파도 공식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고, 개인이 신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 것이다. 개신교가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고 개인에게 신앙의 자유가 주어짐으로서 개혁자들의 순교의 피가 드디어 열매를 맺은 것이다. 프라하 성의 창문은 말없이 밝은 햇살을 안으로 들여보내 주고 있지만, 그곳은 종교개혁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얀 후스(1372-1415)
후스는 체코의 프라하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훗날 이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 위클리프의 글에 매료되어 ‘교회는 교황이 아닌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는 택자들의 모임’이라는 위클리프의 주장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후스가 개혁신학을 배우게 된 존 위클리프(1320-1384)는 14세기 중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위클리프는 “진정한 주권은 교황이 아니라 거룩한 인품에서 나오며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는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부패한 로마 카톨릭의 개혁과 청빈을 강조하던 위클리프는 “그 어떤 성례보다 중요한 것은 설교다”라고 주장하고, “모든 사람은 각자 스스로 성경을 탐구할 권리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를 위해 위클리프는 옥스퍼드의 학자들을 모아서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영어 완역본 성경인 ‘위클리프 성경’이다.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에 놀란 로마 교황청은 1382년에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위클리프 추종자인 ‘롤라드’ 들을 박해하였다.
후스는 프라하 대학시절 옥스퍼드에 유학했던 학생들을 통해 위클리프의 사상과 저술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베들레헴 채플에서 개혁사상을 설교하며 “과거 순교자들의 유물을 만지면 특별한 은혜가 전달된다는 유물 교리를 성토하고,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며 오직 성경만이 영적 권위의 토대”라고 증거하였다.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된 후스는 당시 교황 요한 23세가 나폴리 국왕에 대해 십자군을 일으키고 군사를 모으기 위해 전쟁에 동참하는 자에게 사면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하자 크게 격분하며 ‘시몬주의’의 한 형태라고 공격하였다. 프라하 주민들은 후스에 동조하여 면죄부를 부여하는 교황의 칙서를 불사르는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항거하였다. 이 결과 프라하에서는 교황의 성례 정지령이 선포되었고, 후스는 보헤미아 남부로 피신하여 <교회>, <시몬주의>등의 집필을 통해 개혁사상을 전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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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가 프라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라틴어가 아닌 체코 사람들의 모국어로 설교하였으며, 성당과 수도원에서만 설교하도록한 교황청의 명령을 어기고 캠퍼스와 강의실에서도 설교하며 말씀을 들고 백성들에게 다가섰기 때문이다. 그가 10년 동안 3천 번 이상 설교했던 베들레헴 채플은 구 시가지 광장 근처에 있었다. 일반 여행객들은 ‘천문시계’ 앞에서 매 정시마다 12제자의 모습이 튀어나오는 광경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우리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베들레헴 채플을 방문하였다. 프라하 성의 위용이나 그곳에 있는 성 비투스 성당에 비하면 작은 마구간같이 초라하고 자그마한 교회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후스의 설교단과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쉽게 그린 그림들과 찬송가 악보와 가사들은 여전히 방문객들에게 후스의 개혁신앙과 뜨거운 신앙의 열정을 전해주고 있었다. 설교단 방향에서 교인석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국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후스의 음성이 귓전에 들리는 듯 했다.
로마 교황청은 결국 후스를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발부하였다. 자신의 처형을 직감한 후스는 출두 전에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편지로 써서 보냈다.
“제게 두려움 없는 마음, 올바른 신앙, 견고한 소망, 완전한 사랑을 주셔서 당신을 위해 내 생명을 오래 참음과 기쁨으로 내려놓게 하소서. 아멘”
1415년 7월 6일, 후스는 끝끝내 자신의 신앙을 사수하며 화형장의 불꽃으로 사라졌다. 당시 교황청이 위클리프와 후스의 개혁신앙에 얼마나 놀라고 원한이 맺혔는지 후스를 화형시키는 불을 지피는 데 위클리프의 성경책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거위의 죽음, 백조의 출현
후스가 화형당한 콘스탄츠는 8월 26일, 토요일 낮에 들렀다. 지금은 독일의 소도시 작은 도로 한켠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 하나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흔한 초상화 하나도 없어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후스는 공의회가 열렸던 콘스탄츠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바로 화형을 당했다. 프라하의 구 시가지 광장 한가운데 있는 후스의 동상은 그래서 가장 보편적인 체코인의 얼굴로 만들어졌다. 후스가 화형장의 불꽃으로 사라진 지 벌써 6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체코인들의 가슴 속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전 세계를 향해 당당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었다. 믿음은 불의 세력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의 세력을 멸하며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역사를 이룬다는 말씀은 진정 사실이었다(히 11:34-38). 후스는 화형 당하는 순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당신들은 이 거위를 요리할 수 있겠지만
100년이 지나지 않아 백조 한 마리가 일어나 결국 승리할 것이다”
체코어로 ‘후스’는 거위를 의미한다. 그로부터 정확히 102년 만에 후스가 예언했던 백조, 루터가 등장했다. 로마 교황청은 후스만 화형에 처한 것이 아니라 위클리프의 유골을 파헤쳐 불사르고 그 유해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다. 유골이 파괴되면 부활할 길도 막힐 것이라는 미신적인 믿음의 결과이지만 당시 교황청이 후스와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에 얼마나 분개했는지 알 수 있다.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
제법 선선하면서도 눈부시게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프라하의 둘째날 아침을 맞이했다. 호텔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7:30에 독일 비텐베르그(Wittenberg)를 향해 출발하였다. 어언 4시간 남짓, 아우토반(Autobahn)을 힘차게 달려 도착한 비텐베르크는 ‘루터의 도시’라는 공식명칭답게 루터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니 루터의 모습만 보이지 않을 뿐 그는 여전히 살아서 도시를 활보하며 힘차게 말씀을 전하는 것 같았다.
이곳엔 루터의 가족이 생활하며 몰려드는 수 많은 제자들과 ‘식탁담화’를 즐겼던 ‘루터 하우스’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였던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루터가 시무하였던 비텐베르그 市 교회, 그리고 평생 그의 동역자였던 필립 멜란히톤의 생가가 있다. 또한 루터가 교수로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등을 강의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비텐베르크 대학과 시 청사 광장에 있는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이 나란히 서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비텐베르크의 유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루터 하우스’와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된 ‘성(城) 교회이다. 그중 루터하우스는 원래 어거스틴 수도원 건물로 지어졌던 것으로 1508년 루터가 머물기 시작한 이래 1525년 6월 1일, 카타리나와 결혼하고 자녀들과 함께 평생을 보내었기에 그의 흔적과 체취가 가장 많이 묻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회의실로 사용되고 있는 1층을 둘러보고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갔다. 큼지막한 루터의 책상과 학생들을 위해 벽 둘레를 긴 의자로 장식한 ‘루터의 방’이 500년 전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바로 이곳에서 루터는 멜란히톤을 비롯 당대의 신학자들과 개혁신학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후에 제자들이 이를 정리하여 6권 분량의 방대한 ‘탁상담화’로 빛을 보게 되었다. 400년 동안 독일 사람들에게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책을 빚어낸 장소를 보며, 당장이라도 루터의 가르침과 대화에 끼어들고픈 생각이 든다.
또한 약 40여 개의 수도사 독방들은 갖가지 책과 자료들을 전시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번역한 신약성경 독일어 번역본과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며 옆 빈칸에 빼곡하게 기록한 메모 등 루터의 숨결까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루터하우스를 나오면 정원에서 루터의 사모인 카타리나 여사의 동상이 여행객들을 환영하듯 맞이하고 있다. 루터가 42세 되던 때인 1525년 6월 13일, 16세 연하의 수녀원 출신 카타리나와의 결혼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성직자 가정의 첫 케이스가 되었다. 후에 루터는 아내 카테리나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 “나는 내 케테(카타리나의 애칭)를 프랑스나 이탈리아 베니스를 준다해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루터 하우스를 나와 성 교회로 가는 길에 루터가 시무하였던 시 교회인 성 마리엔 교회가 있고, 바로 그 옆에 시 청사와 광장이 있다. 광장엔 비텐베르크의 두 영웅,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상이 좌우에 서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루터의 동상은 왼손에 성경책을 들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성경책을 가리키며 사람들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성례와 의식 중심의 당시 사회에서 ‘오직 성경’에 주목하였던 루터의 개혁신앙의 핵심을 말해주고 있다. 성 교회를 향해 가는 중심 도로를 따라 멜란히톤의 집과 비텐베르크 대학이 있다. 아직 방학이라 학생들의 수업은 없어 조용하였지만, 이 작은 대학이 종교개혁의 거점이 되어 인류사회를 변혁하는 데 기여하였다는게 부러울 따름이다. 비텐베르크 시의 끝자락에 우뚝 솟은 탑과 교회가 바로 성 교회이다. 루터 당시에는 교회 정문이 나무로 되어 있었고, 그곳은 주민들의 공지사항 등을 게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었다. 그 문은 화재로 소실되어 95개조의 내용을 새겨넣은 철문으로 1858년에 새롭게 제작되었다. 교회 안에는 역시 루터가 설교하였던 설교단이 있고, 그 설교단 밑에는 루터와 동역자 멜란히톤의 무덤이 있었다.
당시 카톨릭에서는 추기경 알브레히트가 면죄부 판매자들을 위해 ‘지침강요’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루터는 이 지침서를 접하고 목회적 측면과 신학적 측면에서 반기를 들었다. 인간의 구원은 면죄부의 구매에 달린 것이 아니라 복음에 따른 회개에 있음을 설파하였다. 이러한 영적 소용돌이 속에서 루터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하고, 1529년에 열린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반 진리에 대항한 최초의 ‘프로테스타치오’(Protestatio, 항의/이의제기. 이 말에서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유래)가 일어났다. 루터는 당시 막강한 교권과 천 년을 내려온 그릇된 신학에 저항하며 ‘십자가’로 맞섰다. 카톨릭이 ‘영광의 신학’을 주장한데 반해 루터는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학’을 설파하며 자신이 평생 사역하며 말씀을 전파하였던 그 설교단 밑에 자신의 뼈를 묻었다.
개혁의 루비콘 강을 건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했을 때만 해도 교황은 “루터는 술취한 독일인이다. 술에서 깨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힘입어 루터의 반박문은 2주 만에 전 독일로 유포되고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화가 난 교황은 “주님의 포도밭에 들어온 맷돼지”라고 루터를 비난하며 그에게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명령하는 칙서를 공포했다. 1520년 10월 10일 교황의 칙서가 비텐베르크의 루터에게 전달되고, 이제 60일 안에루터는 교황의 칙서에 답변을 해야 했다. 60일째 되는 그 해 12월 10일, 루터는 학생들에게 오전 9시까지 엘스터 성문 앞으로 모이라고 한 후, 스콜라 철학의 문서들이 겹겹이 쌓인 장작 더미에 불을 붙이고 교황의 교서를 던져버렸다.
“네가 주님의 거룩한 자(그리스도)를 기만했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의 진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너를 영원히 불에 살라버린다”는 말과 함께. 이는 교황청과의 절연을 공개적으로 확증한 것으로, 루터와 교황은 이제 서로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 강을 이곳에서 건넌 것이다. 그 결과 교황 레오 10세는 1521년 1월 3일 루터와 그 추종자들에게 공식 파문 교서를 보내게 된다. 이로써 종교개혁의 자그마한 횃불은 전 독일과 유럽의 들판을 불태우는 거대한 들불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루터가 교황의 칙서를 불태운 그 자리에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300주년 기념으로 1830년에 참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 나무가 오늘날 비텐베르크 시 입구에 심겨져 ‘루터의 참나무’로 불려지고 있으며, 비텐베르크 성교회와는 정반대방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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